며칠전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믿기힘든 재난은 온 나라를 마치 정지시켜버린 느낌이다.
나는 감정의 불안정 속에서 꽤나 오래 고통받고 있었지만
마치 전염병처럼 퍼진 사회전반의 분위기는 이것을 배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공중에 떠올라 이것을 지켜보는 공기마냥,
감정적으로 오랫동안 심약해져있었기때문에, 그리하여 더 큰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는 변명을하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혹은 본능으로 눈을 감고 입을 닫고 귀를 막았다.
재난에 반응하는 사회는 감정적으로 붕괴하는 절차를 보여준다.
믿기힘든 광경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미디어 스크린앞에서의 놀람은 점차 슬픔으로 바뀌고.
희생자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동정으로.
그리고 그것이 무너지기도 전에 이 일이 벌어지게 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자 쌓이게 된 모든 감정은 사회를 통째로 우울함으로 빠져들게 한다.
목적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소셜 미디어에 도배가 되어가는 소문들과 뉴스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는 것이
도무지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가 그토록 떠받드는 하이테크놀러지 시대의 기기들인지.
알수가 없게 만들기때문에.
나는 논쟁을 피하는 사람이 자청해서 되었다.
하지만 생각했다.
나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것을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고싶었다.
논쟁은 중요하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논쟁은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든 크게한다.
그것은 참이다.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도 완벽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그것이 존재하더라도.
희생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기때문이다.
잘못된 시스템과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못했던 이러한 재난에 대처하는 기획과 엉성한 전략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짜피 곧 드러날 참들을 숨기고, 혹은 그것을 이용하는 미디어나 인간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국민성과 이 전체 사회와 나라를 욕하는 것은 결국 누워서 침뱉기밖에 되지 않는다.
해외를 떠돌며, 이나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내가 이 논쟁에 낄 자격이 있는지는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경험을 통해서 알게된 하나는 있다.
내가 우리엄마아빠의 자식인것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국사람인 것은- 설사 기회가 되어서 국적을 바꾸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바뀌지 않는다.
외국생활을 하면서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내가 가진 국적이 나에게 기회 제한할 때였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국적뿐아니라, 내면적으로 나는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때문에.
나는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으로.
나의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으며 살아야한 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와 그것에서 파생되는 많은 실망스러운 것들을 보았을때.
결코 자랑스러운 국가의 대처는 아니다.
하지만 국가는 결국 정부인가.
그렇지않다.
사람들이다.
뻔하고 뻔한 이야기로.
사람들이 이 국가를 만든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 조직도, 사회도, 국가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비난받아야할 것들은 받아야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맹비난만 퍼붓고 식어버릴 것인가.
고쳐지지않으면 야단은 단순히 듣기싫은 잔소리가 되고만다.
경각심을 일으키는 따끔한 이야기들이 돌아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든 고치려면 사람들이 깨어나길 바란다.
그래서 더이상 이나라 국민인게 싫어요. 챙피해요. 할수만있으면 국적 바꿔버리고 싶다. 하는
대부분의 결코 이루어질 수없는 한탄말고.
어떻게하면 나아지는지 생각하고, 논쟁하고, 그리하여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든 이 나라가 결국 다시 사람들에게로 더 많은 기회를 주면 안되나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현실에 벌어지는 일들에 모두가 분노하며 고통속에 있지만.
이 우울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며.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아 보듬어서 -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이런일이 벌어졌지만, 결코 자랑스럽진않지만. 더 나아지게 만들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꽤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할수있게, 왜냐하면 우리가 꽤 괜찮은 사람들이기때문에.